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형주 공방전 (문단 편집) ==== 관우의 최후 ==== 적을 몰아붙이던 상황에서 순식간에 근거지를 잃고 비참한 상황에 처하게 된 관우는 [[양양(중국 도시)|양양]]의 포위를 풀고 퇴각한다. [[조인]]을 비롯한 위군은 그런 관우를 추격하려고 했지만 [[조엄]]이 '손권은 관우의 배후를 치려고 우리에게 순종하고 있지만 실상은 우리 군사력을 관찰하고 있으며 지금 관우를 추격하면 손권의 태도가 바뀔 가능성이 있다'며 추격을 반대하였고 [[조조]] 역시 관우를 장수들이 추격할까 걱정하여 추격하지 말라는 명을 내리자 추격을 포기하고 손권에게 관우의 처리를 떠맡긴다. 수경주에 이르길 강릉의 옛 성은 관우가 쌓은 것인데, 관우가 북쪽으로 조인을 포위하자 [[여몽]]이 이를 습격하여 점거했다. 관우가 이르길, "이 성은 내가 쌓은 성이니 공격할 수 없다."고 하고는 군을 이끌고 퇴각했다. 이에 관우는 당양으로 돌아와 서쪽으로 맥성을 지켰다. 중국의 학자 전부생(田福生)은 자신의 저서 《관우전關羽傳》[* 田福生 著 《關羽傳》 中国文史出版社 2007年出版 ISBN 978-7-5034-2022-1 第十二章 孤立無援,飲恨千古 第三節 兵敗麥城,章鄉之難 之 困守麥城.]에서 맥성은 수백 가지고는 수만의 오군에 한 달간 대항할 수 없다며 맥성에 2만 명이 주둔했을 거라 여겼다. 어쨌거나 손권이 사자를 보내 항복을 권유했다. 급기야 관우는 거짓항복까지 시도하면서 포위망을 돌파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맥성과 임저의 위치를 보건대 관우는 이미 장악당한 영안 방면이 아니라 상용 방면으로 어떻게든 돌파할 작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될 경우 상용에서 관우를 구원하지 않은 유봉의 죄가 더해진다. 관우를 단순 돕지 않은 것 외에도 그의 죽음을 방조했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관우는 성 꼭대기에 깃발을 꽂아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놓고는 이 틈을 타서 달아났다. 병사들은 모두 와해되어 흩어졌으며, 단지 10여 명의 기병만이 그를 따랐다. 손권은 우선 [[주연(삼국지)|주연]]과 [[반장(삼국지)|반장]]을 시켜 그가 지나갈 지름길을 끊어 놓았다. 관우가 패하자 손권은 [[우번]]으로 하여금 관우의 종말에 대하여 점치도록 했다. 우번이 말했다. '이틀을 넘기지 못하고, 반드시 머리가 끊어질 것입니다.'라고 하니 과연 우번의 말같이 되었다. 때는 12월, 손권은 장수를 보내 관우를 역격(逆擊)하고 [[반장(삼국지)|반장]]의 사마 [[마충]][* 촉의 장수였던 마충과는 동명이인이다. 관우를 사로잡은 공으로 역사서에 쓰여졌는데 그 이전과 이후의 행적은 보이지 않아 하급 장수로 추측된다.]이 장향에서 관우와 그의 아들 [[관평]], 도독 조루를 사로잡아 더 이상 도망 못가도록 붙잡았으며 관우와 그의 아들 관평을 형주 남군 임저현에서 참했다.[* 이런 기록을 보면 나관중 가정본 삼국연의나 신삼국을 비롯한 몇몇 매체에서처럼 관우가 저항을 포기하고 신선같이 태연하게 죽었다기 보단 창천항로나 삼국지 13 같은 매체에서 묘사되는 바와 같이 끝까지 탈출하기 위해 애를 썼고 주군에게로 돌아가기 위해 수많은 군세를 몇기의 기병만으로 돌파하려다가 오군에 둘러싸여 처절하게 난투전으로 끝까지 싸우다가 중과부적으로 잡혀서 죽었을 가능성이 높았다고 볼 수 있다.] 배송지는 손권이 있는 강릉과 관우가 죽임을 당한 임저는 200~300여 리나 거리가 된다며 손권이 직접 관우의 목을 치라 명령하진 않았을 것이라 평가했다. 그렇기에 관우는 현장에서 지휘하던 [[여몽]]이나 관우를 사로잡은 [[반장(삼국지)|반장]]등의 최종적인 판단으로 인해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 관우와 그 아들 관평은 참수당했고 그 수급은 허도의 조조에게로 보내진다. 관우의 시신은 제후의 예로서 장사 지내졌다. 이때 손권은 촉에 있다가 유비에 의해 공안으로 쫓겨난 유장을 얻고 그를 익주목으로 삼아 자귀에 주둔하도록 했는데 얼마 안 되어 유장은 죽었다. 관우가 최후를 맞은 직후에도 형주 일부에서 저항은 계속되었다. 손권이 강릉에 도착하니 모두 다 항복하지만 [[반준]]만이 항복하지 않았는데 손권은 직접 반준을 찾아가 설득시켜 아군으로 만들고 그를 이용해 무릉의 만이들을 규합한 패잔군 [[번주]]가 일으킨 난을 진압하게 한다. 또 거짓 항복했던 [[습진(촉한)|습진]]이 이끄는 패잔병들이 난을 일으켰으나 역시 패한다. 그럼에도 습진은 영릉의 7개 현을 들어 스스로 소릉태수로 칭하며 촉을 섬기면서 저항했다. [[요화]] 역시 포로로 잡혔으나 도주하여 동쪽으로 진군 중인 유비군과 합류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이릉대전에서도 살아남아 촉의 멸망까지 지켜본다. 한편 역시 촉으로 도주하는 데 성공한 [[왕보(촉한)|왕보]]는 유비의 [[이릉대전]]에 참가하나 실패하고 전사했다.[* 연의에서는 맥성에서 관우와 관평의 목을 보고는 충격을 받아 자살한 걸로 나온다.] 하지만 손권이 강릉을 점령한 즈음에 대규모 역병이 발생한다. 이 때문에 손권은 애써 점령한 형주의 조세를 면제해 주는 식으로 민심을 다독여야 했고 때마침 오나라 군대의 기둥이라 할만한 여몽과 장흠을 동시에 잃는 손실까지 겪는다.[* 여몽의 급사 자체는 이전부터 앓아온 지병 때문이라고 볼 여지가 있지만 장흠까지 동시에 죽은 만큼 장흠은 이 질병에 희생되었다는 것이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형주 공격에 참전한 또다른 장수 손교도 이 때 사망. 감녕도 이 즈음 사망했을 가능성도 있는 것(215년설과 219년설, 관우를 잡은 후 반장이 감녕의 군대를 이어받았다.)을 보면 역병의 영향이 상당히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관우의 최후에 대해서 오나라 장수들이 이 시점에 많이 죽어서 관우과의 교전으로 오나라 장수들이 죽었다는 의견도 있는데, 우선 [[여몽]]은 이전부터 지병이 심각했고, [[손교]]는 후속 부대를 맡았으며 [[장흠]]은 면수에서 죽었고 [[감녕]]은 어느 년도에 죽었는지도 불분명하다. 정작 최전방에서 관우를 추격한것은 [[주연(삼국지)|주연]]과 [[반장(삼국지)|반장]]인데 이 두 사람은 관우를 잡은 후에도 무사했다. 따라서 갑작스런 역병에 의한 잇달은 죽음이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이런 질병과 더불어 중요한 상장들을 잃은 데다가 이후 곧이어 이릉대전과 조비의 남정으로 인해 손오는 이 방면에서 더이상의 확장을 이루진 못했다.[* 사실 무릉 같은 경우에는 계속 반란이 일어나 오나라가 통제를 못하는 지경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